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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AUSTRALIA_MELBOURNE 🇦🇺

🇦🇺 D+3 첫 트라이얼, 그리고 늦어버린 면접

by 이 장르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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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에 도착한지 아직 3일차지만 집이나 일이나 정해진 게 없어서 너무 불안했다. 여행이라면 그냥 정해진 것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테고 또 그걸 즐겼을 테지만 막상 삶이 되니 그러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어제 새벽 내내 JORA LOCAL이라는 앱 들어가서 웨이트 스태프랑 바리스타 지원 버튼만 수십 번 눌러둔듯했다. 아마 백 곳 넘게 지원했을걸. 레쥬메를 제대로 쓰지 않아서 그런가. 뭐가 문제일까. 분명 지금 구인난이라던데 나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질 않는걸.

난 내가 이렇게 불안해할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 정말 이렇게 불안에 떤 게 얼마 만인가. 지나고 보면 이 불안이 원동력일 테지만 막상 이 순간을 지나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혔다. 불안한 만큼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바뀌는 건 없다는 걸 아니까. 불안은 되도록 짧게 끝내버려야 한다.

아침에 레쥬메를 수정하고 있는데 모르는 호주 번호로 전화가 왔다. 다행히도 어제 넣었던 지원서에 반응이 온건지 오늘 면접 건너뛰고 저녁에 트라이얼을 오란다. 당연히 간다 했고 뭔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휩싸였다. 수정하려던 레쥬메를 닫고 다시 JORA LOCAL에 들어가서 다시 여기저기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또 하나 잡힌 인터뷰. 어제 새벽 내내 불안에 잠겨 잠이 오지 않던 그 순간이 오래전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언가 하나하나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트램 안타고 걸어가다가 한계를 느낌 ​
 

둘 다 사우스 야라, 그리고 난 시티 쪽. 여기서 트램 타고 좀 가야 하지만 경기도민에게 이 정도 거리야 뭐. 그렇게 일단 준비하고선 밖을 나섰다. 걸어가면 삼십분 좀 넘게 걸리길래 야라강을 지나 걸어가다가 공원 옆 도로를 끼고 걸어야 하는 게 좀 걸려 여기서부턴 트램을 타고 가보기로 했다.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트램탈걸그랬나. 트램으로 몇 정거장 가고 선 한 번 더 갈아타 좀 더 걸어 피자가게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멀어 살짝 당황했지만 사우스 야라 중심부라 늦게 끝나도 위험하진 않겠네 싶어 일단 면접을 보기 위해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트램 타고 갈걸 ​

문을 열고선 카운터에 있는 남자에게 인터뷰 보러 왔다니까 무슨 인터뷰냐고, 인터뷰 일정이 없단다. 어, 이게 아닌데. 그래서 계속 설명하다가 JORA LOCAL로 받은 인터뷰 안내 메시지를 보여주려 앱으로 들어갔는데 아... 여기가 아니다. 주소를 잘못 봤다. 일단 인사를 하고 나와서 시계를 보니 인터뷰 시간이 10분도 안 남은 게 아닌가. 일단 메시지로 주소를 잘못 봤다고 죄송하다며 15분 정도 걸러 것 같다는 얘길 했다. 다행히 이해해 주셨고, 트램을 타고 가려 기다리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램도 안 서고 그냥 지나가더라. 그때 갑자기 우버가 생각나서 앱을 깔고 바로 우버를 불렀다.

아,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진짜 뭘 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정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누구에게도 징징거릴 수 없어 해결되기 전까진 내가 안고 가야 하는 문제인 걸 알기에, 아직은 그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걱정 끼치기도 그리고 스스로에게 해내지 못했다는, 도망쳤다는 낙인을 찍을까 봐 일단 버텨보기로 했다. 울더라도 인터뷰 끝나고 울자. 아직 해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았다. 결과가 어떻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우버를 탔다. 중국어가 흘러나오는 걸 보니 중국인 기사님인가 보다.(근데 알고 보니 대만인이셨음. 그래서 죄송하다고 했음...) 그렇게 그냥 가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뜬금없이 기사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기사님, 우버랑 디디 차이점이 뭐예요?'

이 와중에 이런 거나 물어보고 있다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이렇게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기사님은 친절하게 호주에서 우버와 디디의 차이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고,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여서 이날 디디도 설치했다. (기사님 말로는 시티/먼 거리는 디디, 외곽/가까운 거리는 우버가 잘 잡히고 저렴하단다.) 그 얘길 하다가 제가 오늘 인터뷰에 늦었다니까 기사님이 다독여주시는 게 아닌가. 호주 사람들은 대부분 이지고잉이라 괜찮을 거라고, 인터뷰 잘 볼 거라고 너무 걱정 말라며 나를 응원해 주셨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이지고잉이 아니라서 호주도 그럴까 봐 걱정이라고 했더니 계속 괜찮을 거라 해주셨다. 너무 감사해요 기사님, 덕분에 무사히 왔어요.

들어가자마자 반갑게 인사해 주는 조그마한 여자분과 달리 덩치 있고 조금 인상이 짙으신 남자분이 건성으로 인사를 받아주셨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이 대표인데 이번 인터뷰는 망했구나 싶었다. 여자분이 가져다주시던 물을 한 잔 마시고 기다리고 있다 곧 면접을 봤다.

막상 인터뷰에서는 생각보다 꽤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이것저것 할 줄 아냐 물어보는 것마다 아웃백 일할 때 이미 다 해봤던, 그리고 꽤 할 줄 아는 것들이라 다 할 줄 안다고 말했고, 조금은 다른 부분이 있을 테니 한두 번만 가르쳐주셨으면 한다 했더니 흔쾌히 알겠다 하셨다. 오늘 트라이얼을 해봤으면 한다 하셨지만 이미 다른 곳 트라이얼 일정이 오늘 있는 나는, 그냥 인스펙션 일정이 있다고 뻥치고 다음날 저녁에 트라이얼을 하는 것으로 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생각보다 좋은 분위기, 그리고 인터뷰의 다음 단계인 트라이얼 일정도 얻어냈다는 것에 얼떨떨했다. 기사님의 응원 때문일까, 덕분에 울컥했던 마음이 좀 잔잔해졌다. 인터뷰가 끝났다 해서 방심하고 있을 순 없다. 오늘 남은 일정인 피자 펍 트라이얼을 가야 하니 또다시 외곽 쪽으로 나가는 트램에 올라탔다. 아까 한번 가봤던 곳이라 찾아가긴 쉬웠지만 트라이얼 후 고용된다면 카운터에서 말을 걸었던 그 남자분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트라이얼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물밀듯 올라왔다.

그렇다고 안 갈 순 없지. 내일 트라이얼 연습이라 생각하고 가보자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심호흡하고 다시 들어간 그곳에서 그 남자는 아까와는 달리 나를 꽤나 친절하게 맞이해줬다. 그리고 옆에 있는 여자를 소개해 주면서 그 여자에게 일을 가르쳐주라 했다. 그렇게 나를 가르쳐주게 될 여자는 발랄하고 매력 있는 스타일이었다. 이것저것 알려주려 했고, 그 외의 사람들은 좀 경계 아닌 경계를 하는 느낌이었다. 이것저것 설명을 듣고 있는 동안 출근한 바리스타도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나중엔 친절하게 대해주더라.

일을 시작한 지 한두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정신없이 여기저기 음식을 나르고 있는데 얘네들 자꾸 주문을 안 받는다. 주문을 종이에 받아 적고 포스팅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각자 가지고 있는 아이패드에 주문받음과 동시에 포스팅을 하는 시스템인데, 나에겐 그 시스템을 알려주지도 않고 주문을 받아달라 하는데도 뭐 그리 바쁜지 정신없어 보였다. 그중 한 명 여자애가 본인 일이 말렸는지 괜히 나한테 화풀이도 하더라. 물론 호주의 트라이얼 시스템이 바로 현장에 투입해서 하는 걸 보는 거지만, 시스템 들어가는 방법 정도는 한 번이라도 보여주고 버려둬야 하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트라이얼이 끝났다.

일의 강도와 시급도 중요하지만 서비스직에선 특히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트라이얼이 끝나고 나서 이곳 매니저의 연락이 안 오길 바랐다. 그리고 후에 다행히 안 오기도 했고.

트라이얼 끝나고 받은 트러플 어쩌고 파스타

 

트라이얼도 법적으로는 시급을 받아야 하지만, 대부분의 트라이얼은 끝나고 음식 하나 포장해 주는 것으로 퉁치곤한다. 카페 같은 곳은 이마저도 없이 무급으로 일하다 오는 것이다. 일하는 스타일을 보는 것은 좋으나 한국은 A에서 Z까지 일단 알려주고 시킨다면, 여기는 일단 시킨다. 정말 테이블 번호만 알려주고 던져두는 게 사실 이곳만 그랬던 게 아니기 때문에 이게 호주의 문화려니 생각하고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호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만큼 서비스에 예민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근데 정말 지독한 경력 주의 사회다. 한국보다 더.

피자 펍 트라이얼 끝나고 집 가는 길
 
 
 

인종차별이 많다는 풍문과는 달리,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호의로 둘러싸인 호주에서의 생활을 하고 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들은 이방인인 나를 이방인으로서 배려해 주고 있었다. 차별이라기보다 그들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방식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한국이 나쁘고 호주가 좋다 이런 말이 아니다. 각자 가진 장단점이 있고, 그 장단점이 대부분 한국과 호주가 반대의 포지션을 잡고 있는 것 같아 신기할 뿐이라는 것이다. 나 또한 이방인에게 이렇게 몸에 배듯 배려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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