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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AUSTRALIA_MELBOURNE 🇦🇺

🇦🇺 D+4 호주 입국 4일 만에 오지잡 구한 썰 푼다

by 이 장르 2023.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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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날씨 너무 좋았음

두번쨰로 연락 왔던 수제버거집 트라이얼 날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아니 어차피 안 가기로 결정한 곳이라 연락 안 오는 게 다행인 거지 뭐. 오늘 디너타임부터 트라이얼이니 일단 일할 때 입을 검은 옷을 사러 K 마트에 갔다. 그러다가 문득, 아 이렇게 샀는데 고용 안 되면 기운 빠질 텐데 싶긴 했다. 근데 뭔가 사장님이 기정사실처럼 이것저것 얘길 해서 자꾸 기대하게 되잖아.

일단 옷은 그냥 가져온 검은 옷으로 입고 가기로 했다. 아, 검은 운동화 하나 샀다. 지금 있는 것들은 외출용이라 일할 때 신으면 진짜 발 작살나는 건 시간문제일걸. 20불 주고 러닝화 같은 거 하나 샀는데 꽤 가성비 좋은 듯. 그리고 오피스 웍스가 서 리쥬 메도 출력했다. 복사 카드 충전하느라 쓸데없이 고생 좀 했지만.

그렇게 뭔 정신으로 트라이얼에 갔는지 모르겠다. 가서 바텐더 직원과 사장, 옆 가게 매니저(옆 가게도 사장 소속 가게다. 이 버거집이 추가로 연 가게였음.), 나 이렇게 네 명이 디너타임 홀 담당이었다. 솔직히 뭔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뭐 이것저것 매니저가 알려줬는데 다 기억날 리가. 그리고 사실 사장님이 좀 성격 있는 느낌이라 괜히 잘못 건드려서 일자리 또 날아갈까 봐 긴장했다고.

근데 하루 일해보면서 느낀 건, 사장이 생각보다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직원들이 자신의 일을 하느라 사장이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거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뭔가 일을 분담하는 게 당연하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일하는 것도 깔끔했다. 직원들이 추가로 더 손댈 부분이 없었음. 또 대단한 게, 단골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테이블 돌아다니면서 말동무를 해주는 것. 이게 그냥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일정하게 제공하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근데 그걸 꾸준히 해내온 것 같더라.

누군가는 이게 당연한 거 아니냐 할 텐데, 한국에서 서비스직 알바를 해봤으면 이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알 거라 생각한다. 매니저 혹은 사장이 나에게 '너 오늘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한다면 진짜 말 그대로 같이 일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네 테이블에서 사소한 혹은 귀찮은 일이 생겨도 너한테 굳이 가서 말하지 않을게'라는 의미라는 것. 그리고 사장이 일을 하면 꼭 하나둘 빠트리거나 잘못해서 두세 번 더 일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근데 본인이 뭐 대단한 거라도 성취해낸 마냥 뿌듯해하는 걸 보면 그렇게 킹 받을 수가 없음.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제에 발 가만히 있어 한국 사장들아..

매니저랑 둘이 얘기할 때 나한테 그랬다. 좋은 오너라고. 근데 그런 것 같았다. 내가 아직 호주 생활을 몰라 미숙한 티가 팍팍 나서 빼먹을 부분이 있음에도 내가 그걸 다 챙겨 먹을 수 있도록 고용주로서 알려줌. 사실 호주는 법적으로 Super라는 연금이 있다. 텍스 잡은 기본적으로 이것을 고용주가 고용할 때 함께 들어야 하며, 급여의 15퍼센트를 Super로 추가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시급보다 더 받는 거지 사실.) 근데 꽤 많은 워홀러 고용주들이 자신이 워홀러 명의로 Super를 만들고선 얘가 퇴사하거나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그걸 본인들이 환급받아버린단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싶은데 Super 자체가 이름, 전화번호, 주소, TFN 번호 정도 가지고도 가입이 가능함. 근데 그거 꼭 만들어서 가져와야 한다고, 연금 추가로 15퍼센트가 더 나간다고 말하길래 고맙다 했더니 법이니 당연히 해야 하는 걸 하는 것뿐이라 했다. 확실히 오너로선 깔끔한 스타일이라 좋은 듯.

이번 트라이얼에서도 어김없이 내던져졌지만 그래도 좀 체계 있게 내던져졌다. 매니저가 계속 옆에서 봐줬음. 다 알려 주진 않더라도 이렇게 케어는 해줘야 할 거 아니냐. 트라이얼 동안 여기 사람들도 맘에 들어 여기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트라이얼이 끝나고 난 야외 테이블로 짧게 불려나갔고, 첫 시프트를 받았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펼치더니 내가 가져와야 하는 정보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급을 알려줬다. 솔직히 최저보다 더 받는 거라 이만하면 좋다는 생각으로 바로 좋다고 말했다. 시프트는 많이 주고 싶지만, 최대한 많이 줘보겠지만 웨이트 스텝으로는 시프트가 많기 쉽지 않다. 네가 일을 하는 걸 보고 일을 빨리 익히면 바텐더 일을 가르쳐주겠다며, 바텐더 일을 할 줄 알면 시프트를 많이 넣어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나야 너무 좋지. 아웃백 다닐 때 그으렇게 바에 넣어달라고 이리저리 졸라서 겨우 몇 번 들어간 게 다였는데, 바텐더라니.

이제부터 내 일터

그렇게 사장이 준 종이를 들고선 고용됐다는 사실에 얼떨떨해하면서 앉아 스탭밀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는 런치/디너 한번 끝날 때마다 스태프 밀로 버거가 나옴. 선택할 수 있고 포장해 줌). 그런데 바텐더 하던 톰이 나보고 뭐 마실래? 이러길래 그냥 거절했다. 술도 못 먹고 탄산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라. 근데 좀 시무룩하더니 와인은? 이러길래 아냐 괜찮아^^ 이랬음. 근데 갑자기 한눈판 사이에 와인 벌써 따라놔 버림.. ㅋㅋㅋ 아니 이러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거절하면 버릴 테니 받아들고선 고맙다 했다.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씩 웃고 감. 받아든 와인을 한두 모금 홀짝였더니 맛있었다. 그래서 경계 없이 물도 하나도 안 마시고 그거 한잔 빠르게 다 털고 버거 나온 거 들고선 안녕하고 나옴. 아마 내 홍익인간 모습을 봤겠지. 이틀 후 첫 시프트를 걱정 반 기대반으로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오는 트램에 몸을 실었는데 슬슬 술이 올라오더니 홍익인간으로 변신한 게 온몸으로 느껴졌음. 이게 한국인의 얼인가. 쨌든 숙소까지는 무사히 도착함.

문제의 그 와인.. 근데 맛있긴 했음

 

근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임.. 버거를 받아들었으니 이거 안 먹을 순 없고 내일 먹자니 다 식어서 맛없을 것 같아서 일단 먹어보자 싶어 식당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와 진짜 눈이 살짝살짝 안 보이기 시작하더라. 원래 술 오랜만에 마시면 앞 안 보이고 귀안 들려서 일부러 잘 안 마시려 하는 건데 와 이게 딱 이때 이러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빠른 편이라 도착했고 버거 먹으려고 자리 잡고 앉았는데 옆에서 어떤 분이 나한테 말을 걸었다. 멜버른 맘에 드니?부터 시작해서 본인은 케언즈에서 왔고 케언즈 나중에 놀러 오라고 이쁘다고 하는 말이었는데 솔직히 맨정신이었으면 더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친절한 할아버지였는데 정말 더 있다간 뭐 되겠다 싶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남.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싫어서 그런 게 아녔어요...

분명 버거가 맛이 없지 않을 텐데 너무 맛없길래 그냥 버릴까 하다가 일단 냉장고에 넣어둠(근데 냉장고에 넣어두길 잘했지. 다음날 먹으니까 진짜 너무 맛있더라. 미각 마비됐었나 봄). 그렇게 방에 올라와서 누워있는 내내 머리 깨질 것 같더니 새벽 두세시 되니까 그제야 괜찮아지더라. 와 액땜했다 싶었다 진짜. 톰..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나 진짜 죽는줄알았어...ㅋㅋㅋㅋ

트라이얼 끝나고 받은 스탭밀

생각해 보면 인터뷰할 때 리쥬 메도 출력 안 해간 나에게 왜 기회를 주는가 싶긴 했다. 그리고 나는 뭔 자신감으로 레쥬메조차 출력 안 하고 면접 보러 간 걸까. 확실히 지금 생각해 보면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건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문에 줄어든 일자리가 지금 막 늘어나고 있어 일을 구하긴 이전보다 쉬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이 일을 구하기 쉬워졌다는 말은 아니라는 걸 기억해 줬으면 한다. 호주는 철저하게 경력 사회다. 한국보다 더 경력 주의 사회다. 트라이얼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나 내동댕이쳐질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한국에서 꼭 그 일을 해보고 오길 바란다. 영어를 잘하지 않는 나도 여기서 바로 일을 구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서비스직 알바를 해왔던 경력으로 얻은 눈치, 그리고 비슷한 서비스 시스템 체계, 용어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아예 처음 접하는 일을 호주에서는 전혀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일을 빨리 구하고 싶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할 줄 아는 일을 동시에 지원하는 걸 추천한다는 말이다. 지금 시드니에 있는 내 친구도 바리스타를 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구한 일은 뉴질랜드 워홀 내내 했던 바텐더 일이었다. 웨이트 스텝일 만은 하지 않으려 한국에서 라테아트를 배워왔지만 이날 이후 바리스타 트라이얼 때 확실히 쉽지 않음을 느꼈다 (그렇다고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부디 다들 좋은 일자리에서 일을 했으면 한다. 워홀이 생각보다 해결해야 할 일이 많으며, 그 과정이 쉽진 않으니 그 고생하는 우리 모두 결국 좋은 일들만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 시간에도 고생하고 있는 수많은 워홀러들이 행복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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